서문: 격랑 속 전공의 대표의 퇴장
1년 4개월간 이어진 의료계 갈등의 한가운데서,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상대책위원장이 24일 전격 사퇴 의사를 밝히며 의료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난 2023년 8월 대전협 회장으로 당선된 이래, 그는 윤석열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정책에 반발하며 시작된 의정갈등 심화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전공의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온 그의 퇴장은, 길었던 의정 갈등의 국면 전환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됩니다.
박단 위원장 사퇴의 직접적인 원인
박단 위원장의 사퇴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로 보입니다. 그 자신이 밝혔듯이 "모든 직을 내려놓고자 한다"며 "지난 일 년 반,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했으나 실망만 안겨드렸다. 모든 것이 제 불찰"이라고 밝힌 배경에는 외부 압력과 내부의 균열이 동시에 작용했습니다.
‘빅5’ 병원 전공의들의 조건부 복귀 선언
가장 직접적인 계기 중 하나는 그와 함께 해왔던 주요 수련병원 전공의들의 '조건부 업무 복귀' 움직임이었습니다.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등 소위 '빅5' 병원 전공의 대표들은 이날 공개적으로 정책 결정과정 참여 및 수련 환경 개선을 조건으로 수련을 재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는 의대 증원에 반발해 다수의 전공의가 지난해 2월부터 수련을 중단한 가운데, 주요 병원의 전공의 대표들이 공개적으로 복귀 논의를 제안하고 나선 첫 사례였습니다.
박 위원장은 이들의 행동에 대해 "일 년 반을 함께 고생했던 동료이자 친구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끝내 한 마디 설명도 듣지 못했다"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서울대병원 전공의협의회는 "대선 이후 대전협 비대위 행보는 많이 실망스럽다", "이젠 전쟁에서 진격할 장수가 아닌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할 외교관이 필요하다"고 밝히며 대전협과의 거리두기를 공식화했습니다. 이는 박 위원장을 사실상 고립무원 상태로 만들었으며, 그가 더 이상 강경한 입장을 고수할 동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내부 리더십 논란 및 소통 부재 비판
외부의 압박만큼이나 내부의 균열도 심각했습니다. 박 위원장은 1년 반가량 이어져 온 의정갈등 상황에서 목소리를 높여왔고 대한의사협회 부회장직을 맡기도 했지만, 대선 이후 대외적으로 침묵해 그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최근 사직 전공의와 의대생 일각에서는 박 위원장을 '패싱'한 채 복귀를 위한 자체 설문을 하고 정치권 접촉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사직 전공의 약 200명은 최근 별도의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서울시의사회에 복귀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이들은 "5월 추가 모집 당시 박 위원장의 ‘아직 돌아갈 때가 아니다’는 메시지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며 "이제는 단체가 아닌 개인의 판단으로 움직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의정갈등 심화 내부의 깊은 균열을 드러냈습니다.
원광대병원 사직 전공의 김찬규 씨를 포함한 전공의 30여 명은 박 위원장을 향한 성명에서 "지금 대전협의 의사소통 구조는 누군가가 보기에는, 우리가 비난했던 윤석열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며 "지금처럼 끝내 자기 만족적인 메타포(은유)와 제한된 소통만을 고수하며 희생을 늘려간다면 다음이 있을 수 있을까", "와해는 패배보다 더 해롭다"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며 탄핵을 포함한 비상대책위원회 재편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달 30일까지 총회나 간담회를 열고 활동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최후통첩도 있었습니다.
의대생들 사이에서도 균열의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수업 거부가 선배들의 강요 때문이었다는 신고가 이어지고, 일부는 복귀를 방해하는 선배를 학교에 신고하거나 법적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전공의 패싱 논란도 불거졌습니다. 이처럼 박 위원장은 의정갈등 심화 속에서 전공의들의 다양한 의견을 대변하지 못하고 대안 없는 투쟁만을 일관한다는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박단 위원장의 마지막 메시지와 변화의 조짐
박단 위원장은 사퇴 하루 전까지만 해도 "매 순간 현 사태를 조속히 매듭짓고자 노력한다", "지금까지 사태를 종결하는 방법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뿐이었다"고 공지 글을 올리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는 "이전에도 우리에게 유리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까지 버틴 이유는 단순히 싸우기 위함이 아니라, 지켜야 할 가치와 명확한 방향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현재 정부의 보건 의료 책임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당장 복귀 여부를 결정하거나 서둘러 기한을 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는 새 정부와 전향적으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빅5' 병원 전공의들의 입장 변화로 버틸 동력을 상실하면서 그는 하루 만에 사퇴를 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함께 맡고 있던 대한의사협회 부회장직도 내려놓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박 위원장은 사퇴 메시지에서 "오늘은 9·4 의정 합의 준수 및 의정협의체 재구성을 요구하는 입장을 낼 생각이었고, 내일은 박주민·김영호 의원과 만남이 예정돼 있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대전협의 향후 방향과 재편 가능성
박단 위원장의 사퇴와 한성존, 김은식 서울아산병원 및 세브란스병원 전공의 대표의 조건부 수련 재개 입장 표명에 따라 대전협 비상대책위원회는 재편 수순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전협 비대위는 조만간 수련병원 전공의 대표들이 자리하는 총회를 열어 그간의 활동을 공유하고 향후 계획에 대해 의견을 모을 전망입니다. 지난해 2월 20일 긴급 임시대의원총회를 거쳐 회장직을 맡아오던 박단 위원장과 이른바 '빅5 병원' 전공의 대표 등 총 13명으로 비대위를 구성했던 대전협은 새로운 국면을 맞아 변화를 겪을 것으로 보입니다.
의정갈등 심화 이후, 새로운 해결 모색의 시작
1년 4개월이라는 긴 투쟁 끝에 박단 위원장이 스스로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모쪼록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학생들 끝까지 잘 챙겨주시길 부탁한다"는 그의 마지막 메시지에는 무력감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분열된 전공의들과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만 남았습니다. '투쟁의 장수'는 떠났지만, 정작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그대로이며 갈등의 씨앗들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이제 의정갈등 심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강경 투쟁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진짜 해법을 찾는 여정은 이제 시작입니다. 누군가는 대화의 테이블에 앉아야 하고, 누군가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입니다. 박 위원장에게 탄핵을 요구했던 전공의들 또한 "구성원들은 정치권과 건설적인 논의를 하지 못했고, 복귀를 원하는 개개인의 뜻도 반영하지 못한 채 단체의 명분만 고수했다"고 비판하며 투쟁의 명분과 현실적 필요 사이의 간극을 지적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의정갈등 심화가 남긴 숙제입니다.